최근에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덜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이 우리 나라에서 단숨에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고 있다. 1) 이번에 우리나라 초청방문 강연에도 수천명이 몰릴 정도로 그동안 정의에 목말랐던 것이 어쩌면 우리나라의 현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 주변에서 정의가 사라진 장면들을 자주 목격하고 있기에 어쩌면 위와 같은 현상은 이미 예견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부자들이나 정치인들은 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무마되거나 흐지부지 없었던 일로 덮어지고 서민들은 사소한 잘못조차도 이 사회에서 관용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 아마 더욱 그렇게 느끼게 되지 않나 싶다. 법적으로 예를 들면 최근 인사청문회에서 불거지고 있듯이 대부분의 후보자 들이 위장전입을 통해 주민등록법위반사례가 적발되고 있지만 법은 여기에 대하여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고 있다. 필자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그렇다면 법은 과연 정의를 담고 있는 것인 가이다. 사람들은 어떤 분쟁이 발생하면 “법대로 하자”라는 말을 자주 한다. 여기에 담긴 의미는 법에는 정의가 담겨있으므로 법에 의하면 공평한 결론이 주어진다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과연 그런가?
답은 여러분의 판단에 맡겨져야 하겠지만 필자가 변호사로서의 길을 걸어가면서 느낀 경험에 의하면 일부는 맞는 말이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 가고 있고 그 관계속에는 분명 원활하고 좋은 관계도 있지만 불편하고 나쁜 관계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필시 분쟁이 발생하기 마련이고 이러한 분쟁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사자간의 대화와 타협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의견충돌과 서로의 입장차이가 너무나 큰 나머지 그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법의 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은 길로 빠져들게 된다. 이러한 경우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정의가 작용하게 된다 .예를 들면 민사상 물품을 납품한 업자는 채권이 소멸시효2)에 의해 소멸되지 않는한 당연히 그 대금을 상대방에게 받는 것이 누가보더라도 공평하고 정의에 합당하다. 또한 형사상 사례를 보면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살해하였다고 하면 이에 대한 처벌을 받는 것이 정의에 합당하다고 누구나 여길 것이다. 3) 이러한 것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느끼는 정의다. 그러나 이는 극히 일반적이고 단순한 사례일 뿐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 자기 땅에 건물을 짓는 경우를 살펴 보자. 우리가 소유관념을 가지기 시작한 이래 소유물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고 소유물에 어떤 변형을 가하는 것은 당연히 소유자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다. 단순한 예로 내가 가지고 있는 TV를 이웃에게 공짜로 선물을 하건 그 물건을 부숴버 리건 그건 자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연장선상에서 내 땅에 내가 건물을 짓는다고 하면 상식적으로는 당연히 마음대로 건축물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나라 에서는 건축법에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고 이를 위반할 경우 도시지역은 3년이하의 징역이나 5천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규정은 과연 정의에 합치하는 것인가? 필자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으나 이러한 건축허 가가 필요한 나라가 최근에는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 자기 땅에 건물을 짓는 것에 대해 허가가 필요없는 나라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규정을 두고 법에 규정되어 있으니 정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규정은 분명 정의라고 할 수 없다. 이는 단순한 그 나라의 정책일 뿐이다. 국토가 비좁고 인구가 많아 서로간의 건출물에 의한 피해가 있을 수있기에 정책적으로 법에 이러한 규정을 둔 것에 불과하 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러한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형사상 처벌을 받는 것에 대해 이러한 규정을 몰랐던 사람들은 상당수 억울하다고 여긴다. 필자가 보기에도 시골에서 특별히 높은 건물도 아닌 농가 등을 짓는 경우에는 이러한 법률의 부지(위와 같은 법률 규정을 알지 못하여 허가가 필요한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를 누구나 할 수 있고 분명 억울한 면이 상당히 있다. 그러나 우리의 법원은 법률의 부지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한다. 즉 이런 경우도 예외없이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순진한 농부가 한 순간에 전과자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세상은 이와 같다. 대부분의 하위법령, 특별법 등에서는 정의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정책만이 남아 있다. 그나마 정의가 살아있는 법은 헌법, 민법, 형법 정도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정책을 모르면 처벌받는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법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정의를 담고 있지 않다. 따라서 법이란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적용되 거나 제일먼저 사람들의 관계에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민법상의 규율을 보더라도 제1의 원칙은 계약자유이다. 즉 사람들 사이에 어떤 법률관계를 맺는 경우 그 계약관계는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법은 민법상의 강행법규에 위반하는 계약조항이 존재하 거나 계약위반이 발생하였을 때에만 민법이 개입하게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법적인 규율을 받는 것이 아니다. 형법상의 규율을 보더라도 보충성의 원칙이라는 것이 작용하여 형법은 사회생활에 불가결한 법익을 보호하는 것이 형법이외의 다른 수단에 의하여는 불가능한 경우에 최후의 수단으로 적용된다. 즉 국가가 형벌을 수단으로 특정한 종교적, 도덕적 가치관을 특별한 기준없이 강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법에 있어서 정의문제는 법이 생겨난 이래로 계속해서 논의되어 왔던 주제이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이는 독일의 라인홀트 치펠리우스(Reinhold Zippelius)4) 교수의 법의 본질이라는 책을 통해서도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 알 수 있다. 아래에서 일부 인용해 보겠다. 『우리가 정당한 법에 관한 일상적인 논쟁 - 예컨대 낙태나 적극적 또는 소극적 안락사를 처벌하지 말아야 하는지, 만일 그렇다면 어떠한 조건하에서 그래야 하는지 - 을 생각해 보면, 곧장 의문에 빠지게 된다. 즉 우리가 법적 규율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주관적 입장표명의 영역에 빠지지 않는가? 우리가 특정한 법적 규율을 정당화하거나 도덕적으로 비난할 경우 도대체 우리는 타인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러한 합의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정의에 관한 논의의 주된 대상을 이룬다.』이처럼 법은 정의를 추구하고 있을 뿐이지 법이 곧 정의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법이 일상생활에 곧바로 개입한다는 것은 더욱더 위험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법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법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생활관계에서 일어나는 법적 문제들을 규율하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법은 우리에게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법이 나서기 이전에 우리는 언어라는 소통수단을 통해 상대방과 대화하고 마음을 열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한 분쟁의 해소만이 진정한 분쟁해소라고 할 수 있다. 법원의 판결을 통해 승소하는 경우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처뿐인 영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일단 소송을 통한 비용이 발생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방과 화해를 통한 분쟁 해결이 아니기에 사람들 사이에 불신이 야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신은 사회전체에 불신의 풍조를 만연하게 하여 전체적으로는 우리사회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판사의 재판결과에 불만족하여 사법불신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야기가 너무 무거운 방향으로 흘렀지만 요약하면 법은 만능이 아니라는 것이다. 법은 반드시 우리가 생각 하는 정의에 합당한 결과만을 내놓지도 못한다. 그리고 요즘은 판사들의 업무과중으로 인해 오판이 잦아 당사자 들은 판결에 대하여 더욱더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필자는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사람들의 의식이 성장하여 법이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세상이야 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행복한 세상이 아닐까 문득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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